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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본래는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이치에 맞는데,
  일상을 훑어보면, 오히려 좋아보이는 향수를 쓰는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경우, 이러한 경우가 크게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두고 크게 비판해야할 이유도 없다.
  '향수'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자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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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세계지도를 딱 펴놓고 보면,
  이미 인위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게끔 개발된 여러 표시들을 매개함에 따라,
  인위적인 것(상징, 역사, 세력관계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고,
  이 와중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를 판단하게 된다.

  사람도 일정한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정온동물로 분류되는 것은, 실제 '좋고 나쁘다'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그것 외의 더 많은 이유들이 만들어질 필요성은 왜 제기되는 것이고, 그것이 왜 실현되는 것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맞나요?


  그렇지만 사실 위 문제제기는 크게 의미 없을수도 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위적인 손질을 두고 배타적인 입장을 소구하는 편이지만, 어쩌면 현재의 모습 또한 자연스러운 일의 일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DNA의 한 끝 차이와 두드러진 노력으로 하여금, 호르몬을 시냅스 사이사이 통과시키고 있는 한 생명체임에도, 누군가는 전류를 흘려보내 불을 지피고 LED로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사이, 누군가는 나무위로 올라가고, 또 누군가는 육식동물에게 잡아먹힌다는 식의 진화론적 전개 스토리는 호기심을 충분히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상은 과학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제 시점을 확장하여,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살펴보게 되면 어떨까?
  여기에는 유효성과 효율성, 그리고 잠재성을 평가해야하기에 이른다.

  그 판단은 그럼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요?



  사실 과학적 상상은 자율에 맡기는 것이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겠지만,
  또, 많은 '인위적' 이해관계들은, 이를 제약하기도 한다.
  이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므로 굳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세상에 쓸데없는 말이란 없다고 하신 은사님의 말씀이 떠오르지만,
  인위적 이해관계 속에서, 많은 이들의 말은 '큰 소구'와 '대수롭지 않은 소구', 그리고 '공감'과 '비공감'의 틀에서 해메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 사회과학적인 이야기까지 들어가자면, 이 해메는 과정에서 소구자의 길이 결정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 좋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일의 일환으로 넣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어디까지 이해를 해 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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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세계지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어떠한 이유에서든 어느 지역의 사람은 기아에 허덕이거나 혹은 사정이 조금 나아서 흙탕물을 받아마시면서 미미한 성장을 이루어가고,
  어느 지역의 사람은 풍족하고 유복함을 스스로 만끽하며, '여가'를 알아간다.

  이들의 DNA 구성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한 샘플을 (인종, 민족, 생활환경 등이 다른 형태인 식으로) 잘못 선택한 뒤 DNA 맵을 추출하는 연구 결과가 이미 발표가 되었던 것 같지만, 이것을 정말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을 두 개체로 복제한 뒤, 다른 환경에 살게끔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런 환경적 가치를 고려한 연구 성과도 언제였던가 보았던 것 같다.
  이러한 연구성과로 하여금 교양을 갖춘 이들이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은 것이 현실이라면, 이해하는 마음이 수반된 행동의 나타남이 왜 늦은지 질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기회의 균등'. 그 본질적인 의미를 침해하지 않기 위한 변명

  위에서는 자연 생태학에서 할만한 내용을 주 소재로 잠시 이야기하였지만,
  본래 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이유는, 사회과학에서 다루기에 어울릴법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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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저소득·취약계층을 보조하겠다고 소구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딱히 비판할 여지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잔머리를 굴렸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신문기사를 보면서 나는 '저소득층으로 분류되는 여러 형태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①어쩌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고, ②과연 이것이 옳은 것이며, ③적정한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다소 길게 가져 보았다.
  (사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는, 그 와중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지,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까지 계속 이 생각에만 몰입하고 있었던 것임은 아니다.)

  ①이러한 보조금 지급 정책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절대적인 소득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일 것이다. 굳이 '절대적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이를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환경의 영향은 그 사람의 노력을 무의미화시키기도 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세상에 쓸데없는 말이란 없다'는 은사님들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할 경우, 이것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거나 혹은 인정하지 못하는 탓이 될 것이고, 그럼 그들이 보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갑게도 현실에서는, 그들이 또한 보상할 처지가 되지도 못하기도 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를 강요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배 째라"고 할 지도 모른다.
     가난하면서도 주정뱅이가 되어 일반적인 사회에 대한 열등의식을 심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녀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에는, 그의 현재 여건을 미루어 보았을 때 현실이 무척 가혹한 것이다. 그에 대한 원망은 그의 가족들과 자녀가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②학교 미시경제학 수업시간에 보조금 정책에 대한 내용을 담습한 적이 있는데, 보조금을 지급할 경우 그 돈을 저소득층은 '생계유지', '가계개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닌, '소주'와 '노름'에 사용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정책은 무엇보다도 조심스럽게 전개되어야함이 분명하다.

  ③분명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역으로 되물어보는 재미는 있을 수 있다. (어차피 상상하는 것은 자유이니까) 이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입안한 자들에게, "당신들은 이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과연 어때한 태도의 대답이 되돌아올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되돌아오는 대답이 꼭 바르지 않은 것인가? 또 그렇지만은 않다. 노력의 성과는 분명 되돌아가야하기 때문이다.



  # 본론 - 향기에 대한 향수의 왜곡

  도데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햇갈려할 것 같다. 나도 쓰면서 많이 햇갈리기도 했고, 사실 그래서 이 일기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기도 하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지도 도표를 그리는 것도 현대 기술로는 가능하고, 사실 굳이 그러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충분히 각 국의 1인당 GDP의 현격한 차이를 그리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국내적으로도 가계마다, 지역마다 그러하다.

  경제력이 낮을수록 수명과 건강상태부터 전반적인 복지 혜택까지, '과연 저소득층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짓고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실제로 중상 이상의 혜택을 누리다가 단계가 낮은 효용을 취하려고 하면, 불만족이 발생한다. 그것은 '혐오', '불쾌', '못마땅함', '아쉬움'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하물며 그 곳을 native places로 여기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들은 분명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멋있지도 않고, 또 반대로 중상의 혜택 수혜자들은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다행히 '현재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 되겠지만, 그가 느끼는 행복과 청자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과연 같은 개념일까?
  절대 그럴 수 없다. 행복함을 느끼는 기준은 그의 익숙함에서 묻어나올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여금 그러한 대답을 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자들이 그들에게 '더 좋은 수혜'를 누리게끔 자발적으로 이끌어주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도 소구해보니, 역시나 '이상(ideals)'으로 여겨지는 개념이라고 화답한다. 나도 크게 부정하지 못할 만큼 실현되기 어려운 해답에 해당한다.

  불편한 혜택을 감수해온 사람들이 간혹 불만을 지저분한 방법으로 소구하는 것도 불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일단은 당장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진심으로 (정 어렵다면 예의상으로라도) '혐오', '불쾌', '못마땅함'과 같은 감정 표현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을 선행하는 것이, 작고의 현실에 있어서 쉬울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 정리 -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진심어린 이에 대한 개탄

  하고싶은 말을 정리해보자.

  생태학적으로,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생물은, 같은 과의 생물이라도 그 환경에 적응하기에 알맞게끔 하는 특징(극지방이라면 두터운 지방층이나 털, 적도지방이라면 땀구멍 등)을, 서로 다르게 지니고 있는 것처럼, 사람도 이에 예외라고 생각되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이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 생태학적인 차이가 인간의 뇌 용적 뿐만 아니라, 신체 내 호르몬의 유동성, 정복욕 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공부를 하던, 특별히 치명적인 장애를 지니지 않은 이상, 필요한 만큼의 인풋이 주어지면, 다들 동일한 유효성을 창출할 수 있을 만큼의 재능을 다들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존재를 '인간'으로 통틀기도 하고 말이다.


  생태학적으로 더 심층적인 분석을 함에 따라, 이들을 '열등한 진화의 결과'와 '고등한 진화의 결과'로 구분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윤리 혹은 종교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사회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을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경제학의 시각에서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을 '자원'으로 생각하고, 이 자원의 활용에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효율성은 '형평성'과 trade off 관계를 대체로 맺는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내가 자녀를 키워본 입장이 아니긴 하지만, 나의 자녀가 설령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열등한 군집에 속하는 특성을 몸에 지니고 있을 지언정, 이 아이를 특별히 열등하게 다루고자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공감대를 얻기 어려운 '나쁜' 결정이 되기 알맞다.
  (반대의 경우라면 사실 욕심을 부리고자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경우라면 지금 내가 하는 소구의 실천 대상이 될 지어다.)


  분명 멋있는 자는 보기에도 좋듯이 먹기에도 좋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말이 통계적으로 유의성이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노골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기회의 균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실천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는 비판적으로 생각해봄도 썩 필요하다. 쓸모있는 일이다.



  # 후문

  '세상에 쓸데없는 말이란 없다'는 말은, 은사님들께서 그래서 나에게 인지시켜 주신 것일수도 있고,
  이를 실천하게끔 motivation을 가해주시기 위한 의도가 숨겨졌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론은 끝났고, 퇴고를 하는 지금을 돌아보는 시점을 미루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들에게는 열등감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것은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을 미워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 밖에 없게끔 하는 일련의 종교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일기를 쓰는 지금, 방 안에 나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쑥쓰러워서 그렇다.